허무와 이 아픔을....

by 과천 posted Apr 14, 200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세관에 풍란의 통관 절차도 집사람에게 일임하고,
연길행 중국남방항공에 몸을 실었다.

오직 얼굴도 모르는 동생을 만나고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떻하면 아버님을 중국쪽에서 다시 만날수있는 방법과 계획을 짜기위해,
두시간 반의 비행속에서 나름데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연길비행장에 내리니 처음보는 동생과 중국에 사는 그의 친척들이 마중나왔다.
서먹한 인사를 마치고 두만강쪽 국경선인 개산툰에서 다소 내륙쪽으로 12키로 떨어진 농촌의 친척이라는 집으로 갔다.

서로의 간단한 신분을 확인하고,
본론으로 들어 갔다.
목적은 아버님이였기에...

그런데,

아버님은 6년전에 이미 돌아 가셨다는 것 이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전,
남쪽에 삼촌과 고모를 찿아보라는 유언에 따라 4년전 부터 공작?을 해 이제사 여행증을 발급받아 나왔다 한다.

나를 속인 것은 혹시 내가 안올까 염려하여 거짖말을 했다고 한다.
실망과 허무함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내가 온 목적은 이것이 아닌데...
오직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란 분을 만날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안고 왔는데 말이다.

마실줄 모르는 술이지만 38도나 되는 중국의 술을 몇잔 마셨지만 취하지도 않는다.
잘못했다고 흐느끼는 동생의 등을 두드리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야 했다.

내 혈육을 만났고 그래도 돌아가신 아버님의 날짜 만이라도 바로 알았다는 것 만으로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살아 생전 아버님이 하신 말씀과 살아온 과정,그리고 형제자매들의 소식과 실상들을 밤세워 독주를 마시며 이어졌다.
너무나 비참하고 가슴 찢어지는 생활상이였다.

여러분!
100달러(한화13만원)을 가지고 네가족이 1년을 살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말로만 듣던 먹지못해 굶어죽었다던 이야기가 현실 이였다.
몇년전 동생의 두 자식도 굶어 죽었다는 것이 였다.
김일성시대보다 김정일 시대가 더 기아선상에 허덕인 다고한다.

개산툰을 떠나 두망강을 오른쪽에 바라보며 도문을 거처 3국 국경지역인 훈춘의 해관(세관)에 도착하여 동생과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울지 않던 내가 돌아가는 그의 등을 보고 얼마나 혼자서 울었는지 모른다.

동생을 보내고 농촌의 친척이라는 집에 돌아왔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려고 뒤척이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잠자는 안주인을 깨웠다.
이럴수가....
오늘 북한에서온 동생을 돌려 보냈는데,
몰래 두망강을 건너 온 마흔 뎃 되어 보이는 북녁 사람이였다.

배고프니 밥좀 달라하고, 하룻밤 재워 달라는 것이다.
밖은 아직 찬바람이 세찬데...

늙은 두 내외가 완강히 거부한다.
밥이라도 주자고 하니,아이된단다.
겨우겨우 막무가내로 쫏아 냈다.

사연을 물은 즉,
몇년전 부터 도강하는 탈북자가 많이 늘었으며,불상히 여겨 밥을 주고 옷도 주었으나 점점 도둑이나 강도, 심지어 살인까지 일삼아 이제는 중국정부에서 신고하면 보상도해 주고 만일, 밥을 주거나 숨겨주면 1만원이란(1년간 농사지은 금액 이라함) 거금을 벌금에 처한다고 하니 도와 줄수가 없다는 것 이다.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은 어느듯 사라지고,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는 북한사람들에 가슴이 쓰리고 아플 뿐이다.

떠나 보내는  동생에게 5년에서 10년만 참고 견디라고 했다.
곧 머지않아 붕괴 될 것이라고....

그리고,
또 만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