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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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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향, 蘭  香

                                                          

                                                                                                                                                오 세 윤


 늦가을 아침나절, 일본 문화원에 들러 빌려 본 책을 돌려주고 나와 서점으로 가는 길에 운현궁 문전을 지나게 됐다. 문 앞 채 못 미처, 때 아닌 꽃향기에 문득 걸음이 드텨졌다. 열려진 궁문 안으로부터 은은한 향 줄기가 섬섬히 흘러 나와 코끝에 감겼다. 난향이었다. 마침 ‘서울 란 회(蘭會)’의 스무 돌 전시회가 궁 안에서 한창 열리고 있었다. 전혀 예상 못한 뜻밖의 만남이었다. 주저 없이 문안으로 들어섰다.

 정갈하게 소쇄된 마당에는 짙고 옅은 난향이 바람에 무늬들 듯 난감하게 어우러져 궁 안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은근하게 내리는 는개 같은 가을비에 함초롬 젖은 향이 경내를 한껏 고즈넉하게 했다.

 한란(寒蘭)을 비롯해 춘란 풍란 혜란, 백 서른세 개의 난 분(盆)이 궁 안 온 곳에 가득 전시되고 있었다. 몸채인 노락당에는 주로 품격 높은 한란을, 노안당에는 춘란과 풍란을 볼품 있게 전시했다. 안채인 이노당에는 특별히 격조 있는 한란 두 분을 놓아 주인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아향을 돋우어 나타냈다. 청향에 더하여 자태마저 고고한 일경일화(一莖一花)의 춘란은 그 출처를 구분하여 한국한란, 일본한란, 중국한란으로 각기 이름을 달리해 전시했다.

 별채인 행랑채의 쪽마루와 그 안에는 무늬가 다양하고 화려하여 그 엽예(葉藝)를 즐기는 혜란을 따로 한 무리 전시해 격의 균형을 취했다. 마루 한쪽에는 방금 꽃잎을 틔운 소심란 한분이 새침하게 자리 잡고 앉아 언저리로 맑은 향을 얄브스름 퍼뜨리고 있었다.

 한옥의 운치는 그 멋스러움이 시시로 다르다. 절기 따라 다르고 우설(雨雪) 따라 다르다. 낮밤에 따라도 그 풍류가 만색으로 별스럽다. 사저가 그러한데 하물며 궁이야 말해 무엇 하랴. 난향 어우른 추색 짙은 운현궁, 어슬한 대청에서는 방금 추란을 엮어 허리에 찬(紉秋蘭以爲佩, 屈平, 離騷) 대원군이 도포자락 여며 잡으며 섬돌 아래로 내려설 듯 청려한 고풍이 예나 다름없이 그대로다. 

 달포 전, 철학하는 지우 남 교수의 사랑방에 들렀을 때 있었던 풍정 한 토막. -

 수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교수가 인사동에서 구했다며 대뜸 5,6호 크기의 표구 된 난 한 폭을 내보인다. 대원군이 말년에 친 진품이라며 오랜 지면의 고화점 주인이 소장하기를 권해 가지고 왔다 밝히면서도 미덥기가 덜한지 고개를 갸웃하여 내 눈치를 살핀다. 그림에 눈을 준채 핀잔이듯 한마디 했다.

 “영인본이면 어때서? 걸어놓고 보는 거야 다 마찬가진데.......”

 “그래도- ”

 대답이 찜찜하다.

 “왜 갑자기 투자라도 하고픈 생각이 난거요?”

 고깝게 들을 만도 한데 역시 선비다.

 “그게 아닐세, 향기는 진품이라야만 나거든.”

 한 결 위다. 언행을 사려 향 그윽하기로 난(蘭)만한이 또 있을까. 옛사람은 난을 ‘오로지 내면의 충실을 꾀할 뿐,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군자의 지조라 하여 그를 귀애했다.

 향은 부드러움이요 자연스러움이다. 숲에 드는 것도, 산에 드는 것도 그 모두 나무와 바위, 산마루에 얹힌 구름과 하늘빛의 유자한 멋 때문이 아니겠는가. 개발이란 명목으로 깎여 허리를 드러낸 산, 인위적으로 비틀리고 가지를 쳐 자연스러움을 잃은 나무, 탐욕에 물든 사람에게는 활탈한 생감이 없다. 어둡다. 향이 없다. 다만 추한 속과 속되게 꾸며진 외양만이 있을 뿐.

 세월에 얹혀 흐르면서 가장 경계해야할 일이 바로 향의 가심일 듯하다. 향이 가신 꽃은 외양뿐이요 사람 또한 굳음만이 있을 뿐이다. 굳음은 쇠함이요 죽음이다. 옛날 노자가 임종에 든 스승 상용을 찾아 마지막 가르침을 청했을 때, 그는 말없이 입을 벌려 ‘부드러움의 힘’을 가르쳤다. 딱딱한 이(치아)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입, 부드러운 혀와 입술은 끝까지 남아 주인의 몸을 살아있게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고 떠났다.

 향은 사랑이요 정성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남긴 것도 사랑이요 정성이다. 바로 향이다.

 향은 너그러움이다. 입적하여 이레 동안 불이 붙지 않던 다비장, 제자 가섭이 오고서야 관에서 한쪽 발을 내어 반가운 인사를 한 뒤 평허(平虛)히 이승을 떠난 석가. 그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생로병사, 그 윤회의 고해에서 인간을 깨우쳐 함께 해탈하고자 한 부처의 자비 또한 품음의 향이다.

 향은 용서함이다. 공자가 깨우치기 쉽지 않은, 실천하기는 더욱 어려운 그 많은 미언(微言)을 하시고도 여전히 널리 추앙받음도 그의 겸허한 예와 어진 덕의 향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자 증자가 스승께 도를 묻자 하신 말씀도 이에서 전혀 다르지가 않다. - 나의 도는 하나로 꿰어있다, 다만 충서일 따름이다( 我道也 一以貫之 , 忠恕而已矣).

 수고하여 한 생을 산 이로 향 한 자락 지니지 아니한다면 어찌 그 삶이 의미 있다 이르랴. 내 여생의 하루하루도 이같이 향으로 한결같기를 희원(希願)하며 비 머춤해진 궁을 나서 통문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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